영화 신세계(2013)의 가공물입니다.
동성애와 브로맨스에 거부감을 갖고 계신분들은 창을 꺼주세요.
‘님...’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면 보이는 미약하게 끌어올려진 입꼬리만 보여주는 희미한 매실꽃 같은 웃음이 있는 얼굴.
“형님.”
작지만 힘 있고 정확하게 들려오는 한 단어에 담겨 있는 수많은 감정.
걱정, 질책, 또는 아무런 뜻 없는 부름.
‘청이형님’
창백한 피부에 덧씌어진 까만 머리카락과 까만 눈동자.
곁에 선 그에게서 느껴지는 달큰한 살 냄새.
언제나처럼 바로 곁에 서 있는 자성에게 손을 뻗었다.
어깨를 감싸기 위해 뻗은 손끝에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본 비행기는 곧 착륙할 예정입니다. 안전벨트를 착용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상냥한 안내 목소리에 정청은 눈을 뜨고도 아무런 빛이 느껴지지 않자 거칠게 안대를 벗었다.
“씨발...”
분명히 손끝에 닿았던 어깨의 온도와 다른 거친 감촉이 손끝에 느껴졌다. 정청은 힘을 주어 신경질적으로 안대를 움켜쥐었다.
“뭐 이런 개 같은 꿈이 다 있다냐.”
정청은 아직도 아른 거리는 꿈을 떨쳐버리기 위해 마른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비행기에서 내려 공항을 빠져나오자 익숙한 얼굴의 서원이 배웅을 나와 있었다.
“형님. 어서오십시오.”
“잘 지냈냐. 더럽게 고생혔는갑다. 얼굴이 반 토막이 되어 붓네잉.”
“아닙니다. 형님 기대에 미치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그려 고생헌다. 그 새끼들하고 약속이 언제 잡혔냐?”
“최대한 당겨서 오늘 저녁에 잡아 두었습니다.”
“그려, 씨발. 느가 얼마나 알아서 잘 혔겄냐. 힘든건 읍냐.”
“아무래도 화교라고 하지만 한국사람이라고 해서 배척하는 경우도 있고. 생각처럼 쉽게는 안되는 것 같아서 좀 속상합니다.”
“씨발. 세상 좆같것다. 쬠만 더 고생혀라.”
“아닙니다.”
익숙하지 않은 공기,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풍경이 창문 밖으로 펼쳐지고 있었다.
정청은 짧은 비행시간을 끝내고 호텔로 향하는 차 안에서 서류를 다시 살펴보고 있었다.
정청은 저녁에 약속이 잡힌 대로 중국 삼합회들과 만나기 위해 준비를 해야 했다.
자성이 세탁소의 문을 밀고 들어가자 다리미질을 하던 용필이 자성의 팔을 잡아 급하게 이끌었다.
“사장님 호출이에요.”
“무슨 일인데...”
재촉하는 용필에게 이끌려 움직이지 않는 발을 끌며 작게 반항해 보았지만 어느새 팀장인 지호 앞으로 끌려간 자성은 그녀가 손짓 하는 대로 의자에 앉았다.
“출근 안했던데.”
“술을 마시느라...”
“속 좋네. 술 마실 여유도 있고. 돌려말하는 재주는 없으니 말할게. 그 김서원 뒤에 있는 남자 이 사람 맞지?”
사장이 책상 위로 올려준 파일을 열어보자 사람들 사이에서 눈에 들어오는 곱슬머리를 가진 사내를 보고 자성은 입술이 마르는 것을 느꼈다.
“정청이 중국에 들어온다는 소식이야. 삼합회랑 접촉하고 출국한다는데, 강과장에게 물어보니 골드문 안에서도 정청이 출국했다는 소식을 들은 사람은 없다고 하네.”
자성은 사장의 말을 끊고 더 이상 할 이야기가 없다는 듯 파일을 덮고 자신에게서 멀리 밀었다.
“저 보다는 자세한 이야기는 강과장에게 듣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전에도 이런 적 있었어?”
“.....”
“말 안할 거야? 미쓰리는 지금 민간인 신분 이라는 거 몰라? 우리 쪽에서 그쪽 신분 정리하면 그쪽은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이야. 모르지는 않잖아.”
고분고분 말을 따르라는 사장의 협박에 자성은 입을 다물었다.
“저는 이 건에서 손 때겠습니다. 그리고 기원도 형...아니 정청이 출국한 뒤로 출근할겁니다.”
“왜 들킬까봐 걱정돼?”
“.....”
“하긴, 죽은 사람이 눈앞에 나타나면 나라도 놀라겠네. 그런데 말이야. 미쓰리. 우리도 땅 파서 장사하는 거 아니야. 자꾸 자기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하면 우리도 힘들어.”
자성은 강과장에게도 들었던 지긋지긋한 협박에 질린 듯 조개처럼 입을 굳게 다물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 자성과 기싸움을 하던 사장도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손짓으로 나가보라고 할 뿐이었다.
세탁소 안에서 멀어져 가는 자성의 뒷모습을 보던 사장이 다리미질을 하던 용필에게 입을 열었다.
“용필아. 저 새끼 1:1로 붙어라. 뭔가, 딴짓 할 것 같은 느낌이니까.”
“네? 미쓰리를요? 저 세탁물도 이렇게 많이 밀렸는데요?”
용필이 한 쪽에 걸려있는 옷걸이를 가리키며 불만을 내뱉자 사장은 그를 째리며 입을 열었다.
“이제껏 논 주제에 말이 많다. 한 때 죽고 못 사는 형님 아우 하던 사이였으니까. 마크 잘 하고.”
“그 정청이라는 사람 어제 왔다고 하지 않았아요? 밖에 안 돌아다니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네가 지금 미쓰리 걱정할 때가 아닐텐데? 응? 용필아.”
“예. 예.”
세탁소를 나온 자성은 담배를 꺼내 입술에 물었다가 불을 붙이지 못하고 걸음을 옮기며 담배를 땅에 버렸다. 사람들 틈에 섞여 걸음을 옮기던 자성은 자신의 팔을 붙잡은 손에 놀라며 걸음을 멈춘 채 고개를 돌렸다.
서로의 얼굴을 마주한 두 사람은 그대로 몸을 굳힌 채 움직이지 못했다.
선글라스를 끼지 않은 남자의 고동색 눈동자가 자성을 담은 채 혼란스러워 하고 있었다.
자성이 먼저 얼굴을 돌리고 중국어를 뱉으며 걸음을 옮겼다. 아니, 옮기려고 팔을 빼내었지만 다시 급하게 잡아오는 손에는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남자는 수 많은 말 중에 하나도 내뱉지 못하고 입술을 벌린 채 자성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성은 표정을 굳히며 팔을 털어버리고 걸음을 옮겼다. 이번에는 그의 손에 잡히지 않기 위해 발걸음을 재촉해 결국에는 달리기 시작했다. 자성은 등 뒤로 쫓아오는 발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아 뒤도 돌아보지 못하고 숨이 목 끝까지 밀려오는 것을 느끼며 골목 사이로 뛰었다.
앞이 가로 막힌 골목에 들어선 자성은 낭패감을 느끼며 뒤를 돌아보았다. 다행히 뒤를 쫓는 발소리가 들려오지 않자 다리가 풀리는 것을 느끼며 벽에 기대어 주저앉았다.
숨을 고른 자성은 덜덜 떨리는 몸을 진정시키며 사라지기 위해 어디론가 걸음을 옮겼다.
자성을 붙잡은 남자가 누구냐구요? 그건... 비-밀!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