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에 도착해 셔터를 올리고 햇빛이 들지 않은 좁고 가파른 계단 끝에 있는 닫혀있는 문을 열고 들어가자 넓지도 좁지도 않은 공간이 자성을 반기며 하루가 시작되는 것을 알렸다.
기원에서 자성은 말을 아꼈다. 이야기를 하러 온 사람에게 이야기를 하는 것도 그렇고, 혀를 잘 못 놀리다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과거를 흘리게 될까봐 자연스럽게 말을 아끼게 되었다. 출장소의 일을 하기에 자성이 천재가 아닌 이상, 모든 대화를 기억할 수는 없었기에 주머니에 작은 소형 녹음기를 넣어 정보원들의 대화를 녹음하고, 기원의 영업이 끝나면 집으로 돌아가 녹음된 대화를 들으며 보고서를 작성했다.
말을 아끼다 보니. 간혹, 어떤 사람들은 벙어리가 아니냐고 물었던 적이 있었다. 자성은 그에게 눈길 한 번 주고는 입을 열지 않았다.
출장소를 하면서 느낀 점은. 자신도 이렇게 신우에게 말을 많이 했었나 싶었다.
귀가 따가울 정도로 그들의 이야기를 한 참 동안 듣다가 그들이 수많은 이야기를 쏟아내고 나가면 자성은 한 동안 귓가에 그들의 목소리가 자신을 따라 다니는 것 같았기에 지긋지긋한 목소리를 떨치려고 괜히 듣지도 않은 음악을 틀기도 했다.
제일 잠이 쏟아지는 오후 3시에는 어린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와 바둑을 두기도 하는데 지지배배 조그마한 입을 쫑알거리는 소리는 새 소리와 같았다.
탁-!
바둑판 위에 놓인 바둑알들이 창문으로 들어오는 주황색 노을에 물들면 자성은 자리에서 일어나 전등을 켰다.
백열등의 불빛에 바둑판 위에 있는 돌들이 흑과 백으로 명확해 졌다. 그렇게 하루가 흘러갔다.
저녁 6시 40분.
자성은 자리에서 일어나 기원을 정리하고 문을 닫을 준비를 했다. 7시가 조금 못 된 시간. 기원을 정리가 끝나고 좁고 가파른 계단을 천천히 내려와 입구를 닫을 셔터를 끌어내리고 자물쇠를 채웠다.
몸을 돌려 사람들 틈으로 섞여 걸음을 옮기던 자성은 가게에 들러 술을 사야겠다고 생각했다.
손에 들려 있는 비닐을 식탁 위에 올려놓자 비닐 무게에 피가 통하지 못한 손가락들이 저렸고 술은 좁은 식탁을 넘을 듯 가득 쌓여 있었다. 자성은 의자에 주저앉아 비닐 안으로 손을 뻗어 술 한 캔을 꺼내어 고리에 손가락을 걸고 캔을 땄다. 그리고 갈증을 해소하려는 사람처럼 숨도 쉬지 않고 단 숨에 술을 들이마시고는 빈 캔을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
“하!”
자성은 비닐봉지에 손을 넣어 다른 캔을 땄다. 그렇게 술에 질식 할 것처럼 입으로 술을 들이 붓던 자성은 비닐이 텅 비자 눈썹을 찡그리고 빈 비닐을 손에 쥐고 흔들었다. 자성의 손에 이리저리 흔들리던 비닐은 공기를 타고 느리게 바닥으로 떨어졌다. 자성의 발밑에는 빈 캔들이 어지럽게 놓여 있었다.
바닥에 굴러다니는 캔을 줍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자성은 그대로 자신의 몸이 앞으로 꼬꾸라지는 것을 느꼈다.
쿠당탕탕!
요란스러운 소리가 날카롭게 귀에 들려 왔지만 몸은 술에 취해 말을 듣지 않았다.
“크흡... 후-... 하...하하! 하하하하하!!!”
막대기와 같은 몸을 돌려 천장을 본 자성의 입에서 웃음이 사그라지고 흐느낌이 흘러나왔다.
‘정청.’
그 이름의 무게에 짓눌려 악몽을 꾸던 날이 몇 년일까.
벗어났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나 스스로가 그에게 갖는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계속 몸부림치고 있었다는 것을 인정 할 수밖에 없었다.
“그냥, 죽어버리지...”
서류에 있는 서원의 사진을 본 순간 머리가 하얗게 비어버려서 아무런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리고, 순간 정청이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생각이 미치자 눈에 힘을 주고 눈물이 나오는 것을 참아야 했다.
한국에 사는 사람의 소식이 중국까지 들려올 확률이 몇이나 될까...
“확!! 뒈져버리지! 흐-흡. 흑. 죽어버려... 제발... 죽어버리라고...”
자성의 입에서 뱉어져 나온 말들이 정청에게 쏟아내는 원망인지, 아니면, 자기 자신을 자학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
영문을 모르고 자신을 안내하는 기생의 뒤를 따라 온 이사들은 문이 열리자 산해진미가 모두 올라와 있는지 커다란 상 위를 가득 채운 음식에 놀라 쉽게 발을 들이지 못했다.
독은 화려한 꽃 속에 숨어 있다고 하지 않은가.
“선배님. 어서 들어오셔요잉. 왜 그라고 못 볼 거 볼 사람처럼 놀란다요잉.”
미닫이문이 열리면 바로 보이는 곳에 앉아 손님을 맞이하는 정청의 속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기에 눈을 굴리며 상황을 이해하려고 애썼다.
“우리 정이사가 이렇게 나를 저녁 식사에 초대해 주니 오긴 왔는데.”
이사들은 자리에 앉아 서로의 눈치를 보며 눈동자를 굴리기 바빴다.
“오늘 약속 있다고 한 게 여기였어?”
“크흠, 흠. 그러는 자네도 안 간다더니.”
“씨발, 귓속말도 겁나 다정히 하시고. 두 분이 정분 나시긋네. 우선 배때기부터 채우고 천천히 이야기 합시다잉. 뭣 허냐! 술잔 채워라!!!”
나비와 같이 한복 자락을 하늘거리며 소리 없이 다가온 기생이 주전자를 들고 술을 채웠다.
“마시고, 취헙시다잉. 아따, 나가 우리 선배님들이 얼굴이 반쪽들이 되가지고, 마음이 아파서 그래요. 그란께, 걱정 마시고 많이 드세요잉.”
정청이 잔이 허공에 들자 눈치를 보던 이사들도 술을 입에 털어 넣었다.
애교를 떨며 안주를 집어주는 기생의 몸짓에 술이 오르자 이사들이 입을 열었다.
“옛날부터 이라고, 우리 생각해 주는 것은 정이사 밖에 없네.”
“아따, 우리 선배님들이 좆빠지게 힘드셨는 갑네. 씨발. 내가 이런 자리 자주 마련 할 텐께요. 우리 선배님들은 암 걱정 마시고 즐기셔요잉.”
음악이 흐르고 웃음이 터지고 상을 가득 채운 음식이 반으로 줄어들 정도로 시간이 흐르자 술에 취한 이사들의 입에서 불만이 터져 나왔다.
“중구놈은 위아래도 모르고... 쯧...!”
“어허. 회장님 성함을...”
“회장도 없는 곳에서는 뒷담화 하고 그러는 거지!”
“옳소! 툭 까놓고, 정 이사가 회장에 올랐으면 우리가 이렇게 찬밥이겠어?”
“이 사람들이 못 하는 소리가 없어!”
“안 그런가 정이사~”
정청은 아무 대답없이 웃으며 술을 마시며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앞에는 어디에서도 쉽게 먹을 수 없는 진미, 손에 든 술잔에는 달콤한 술, 그리고 옆구리에는 행동마저도 요염하면서도 낭창한 여자. 남자에게 이와 같은 천국이 어디 있을까.
풀어질 대로 풀어진 그들 중에서 중구에게 불만을 가진 이사들을 골라내기란 식은 죽 먹는 일보다 쉬웠다.
“예.예. 많이 처드세요잉. 이라고 이쁜 계집년들이 새모이 마냥 좆같이 집어 주는 긋이 마지막 일지도 모른디 배 터지게 처묵어야죠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