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짝 걸쳐있는 드럼통의 뚜껑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벗겨내자 드럼통 안은 새까만 어둠에 먹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등골이 서늘하게 식는 불안한 기분을 느끼며 뒷걸음질 치려고 움직이자, 드럼통에서 두꺼운 손 하나가 뻗어 나와 자성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손목을 놓치지 않으려 강하게 움켜쥔 손에 몸이 굳었다. 손톱이 깨지고, 피가 묻어 있는 손을 거슬러 올라가자 드럼통에서 나온 익숙한 모습에 숨을 쉬지 못했다. 머리가 깨져 얼굴에 피가 범벅이 되어 자신이 아는 정청이 맞는지 알지도 못할 정도로 붓고 어긋난 얼굴이 보였다. 데굴. 하고 눈동자가 굴러가는 소리가 들렸다. 눈꺼풀이 부워 잘 떠지지 않는 틈으로 정청의 호박색 눈동자가 눈이 마주치자 자성은 경기를 일으키듯이 팔을 흔들며 손을 때어 내려 했다.
턱.
정청의 다른 손이 자성의 팔꿈치를 잡아 밧줄처럼 기어오르는 것을 느낀 자성은 소리조차 지르지 못한 채 그대로 주저앉아 정청의 손에 의해 새까만 드럼통으로 질질 끌려갔다.
장님처럼 어깨를 더듬고 목을 더듬던 차갑고 찐덕이는 손이 뺨을 감싸며 피비린내가 나는 입술을 들썩였다.
‘느... 왜 그랬냐...’
자신을 원망하는 목소리와 함께 얼굴로 쏟아지는 피비린내에 섞인 시체 썩은 냄새에 자성은 눈을 꽉 감아 버렸다.
“헉!....허억!!!헉...!!!”
눈을 뜬 자성은 숨을 거칠게 들이쉬며 침대에서 튕겨지듯이 일어섰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고 손이 떨렸다.
과거의 기억이 상상과 합쳐져 꿈으로 찾아와 괴롭혔다.
‘아가. 자냐?’
귓가에 들려오는 다정한 목소리마저도 공포스러워 정청의 흔적을 떨쳐버리려고 화장실로 뛰어가 물을 틀어 얼굴의 감각이 없어질 정도로 계속 얼굴을 씻어내었다.
거울 속에 그의 환영이 있는 것 같아 고개를 들지 못하고 세면대를 두 손으로 붙잡은 채 숨을 정리했다.
지이이이잉-
고요한 집안에 휴대폰의 진동소리가 들리자 자성은 몸을 틀어 침대로 향했다.
침대 옆 협탁 위에 올려져 있는 여러개의 휴대폰 중에 빛을 내며 울리는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예, Miss.Lee입니다.”
[세탁물이 밀려서 연락드렸습니다.]
“곧 가겠습니다.”
[빨리 와주세요.]
-
“형님?”
“응? 미안허다. 그란께, 어디까지 혔냐?”
‘영업이사 김재헌’으로 적혀있는 명패가 낯설다는 듯이 시선을 때지 못한 정청은 자신을 부르는 재헌의 목소리에 그제서야 고개를 돌렸다.
“피곤하면 먼저 들어가서 쉬십시오.”
“아니다. 그것이 아녀. 계속 혀자. 우리가 노가릴 깔 시간도 읍다는 거 알잖냐.”
변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것이 어느날 갑자기 당연하지 않게 되어버린 사실에 쉽게 적응할 수가 없었다.
“예. 지금 이전률이 10%정도 진행되고 있고 5년 이내에 중국 본토로 모두 이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영감은 만나 봤냐?”
“장수기말입니까? 예. 만나긴 했지만, 그쪽에서는 선뜻 답을 해주지 않고 있습니다.”
“조심성이 더럽게 많은 늙은이네잉. 눈에 안 띄게, 좋은데서 밥이나 한 번 먹자고 혀라잉.”
“예. 이번주내로 약속 잡겠습니다.”
“중구쪽 움직임은 어떠드냐.”
“아직 많은 조직원들이 출소하지 않아서 세력이 큰 편이 아니라 함부로 움직이지 않고 있습니다.”
“시간싸움이네잉. 힘들것지만 빨리빨리 움직여야 쓰긋다.”
“아닙니다.”
“야들 여권은 어떻게 됐냐?”
“사원들에게 지시해 두었습니다.”
“눈에 안 뜨이게 잘 혀라.”
“예.”
“나도 나갔다 올란께. 중구시끼 잘 감시허고.”
“예. 알겠습니다.”
정청은 소파에서 일어나 다시 책상으로 시선을 돌렸다.
무거운 사무실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영업이사 김재헌’이라는 글씨를 한 번 훑고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몸을 돌려 사무실을 나섰다.
-
자성은 옷이 가득 걸려 있는 세탁소의 문을 열고 들어갔고 노래를 흥얼거리며 다리미를 밀던 용필이 자성을 보고 손을 흔들었다.
“미스리~. 지각이에요 지각. 사장님이 얼마나 화를 내시던지!”
“월급도 안주면서 무슨.”
“에이~ 쥐꼬리만 하지만 무시하면 안되죠.”
머리를 핀으로 올려 집은 여자가 웃으며 용필의 엉덩이를 토닥였다.
“수다 떨 시간 있으면 다리미질이나 더 해라. 용필아.”
“예-엡.”
“미스리는 나 좀 봐요.”
자성은 자신을 부르는 팀장의 뒤를 따라 팀장의 방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요즘 갑자기 덩치가 커지고 있는 조직인데, 보스가 한국 사람이라는 정보가 있어서 혹시 아는 사람인가 해서 불렀어.”
“누굽니까?”
“김서원. 전남 여수 출신이고. 현재 골드문이라는 회사랑 관계가 있다던데, 미스리도 골드문인가 하는 회사에 근무했던 거 아닌가?”
파일철에 끼워진 사진을 본 자성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지는 것을 발견한 팀장이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조사할까? 아니면, 미스리가 말해 줄래?”
“김서원, 주로 영업장 확장 할 때 움직이는 조직원입니다.”
“윗대가리가 따로 있다는 말?”
“....형ㄴ...아니, 정청. 전남 여수 출신으로 화교입니다.”
“흠. 정청...”
“삼합회랑 손을 잡으려고 했던 적이 있습니다. 다시 시도하나 봅니다.”
“주로 어떤 부분을 교류하려고 하는데?”
“뭐, 깡패야 똑같잖습니까. 돈 되는 것을 하려 하겠죠.”
“미스리가 좀 까칠하네. 정이라도 남은건가?”
“아니오. 건축회사로 되어 있지만, 철거, 용역, 건축회사 뒤를 봐주는 일정도 할 겁니다. 제가 빠져나온 뒤로 회사가 많이 달라졌을 겁니다. 강과장님한테 서류를 달라고 하시는 게 더 정확할 겁니다.”
“그래? 알겠어. 이번 주 보고서도 부탁해.”
“예.”
우습게 정보원이던 자신은 이제 신우가 했던 출장소를 하게 되었고 딱히 특기가 없던 자신은 그렇게 지긋지긋한 바둑도 어쩔 수 없이 두게 되었다. 신우가 알면 분명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자신을 바라볼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