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성은 까무룩 흐려진 정신이 깨어나는 것을 느끼며 무의식적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려고 했다.
잘그락.
손이 얼굴에 닿지 못하고 허공에 멈추었다. 다시 손을 움직이려 했지만 일정 거리 이상을 움직이지 못하고 허공을 휘저었다.
눈을 뜨고 몸을 굴려 허공에 덜렁이는 오른손을 훑어라보니 손목에 반짝이는 무언가가 있었고 침대의 틀에 반대편이 걸려있었다.
그것이 수갑이라는 것을 깨닫자 번개를 맞은 것처럼 정신이 머릿속에 꽂혔다. 자성은 몸을 움직여 다급히 침대를 왼손으로 딛고 몸을 일으켜 빠르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기로 자신을 옮긴게 용필일까?
벽은 벽지하나 발려지지 않았고 파이프도 밖으로 들어나 얽혀있는 것이 버려진 공장으로 보였다. 창문으로 추측되는 벽에는 판자가 마구잡이로 덧대어져 햇빛을 가로 막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누워있던 곳에서 다섯걸음 정도의 거리에 새빨간 녹이 페인트를 대신한 커다란 드럼통이 있었다. 드럼통 안에는 장작불이 타고 있었고 드럼통 옆에 놓여있는 의자에는 누군가 그 곳이 있었다는 것을 알려주듯 잡지하나가 펼쳐져있었다. 그리고 그 너머로 굳게 닫힌 철문이 하나가 보였다.
자성은 침대에서 몸을 돌려 판자가 덧대어진 등 뒤의 벽을 살폈다. 습관적으로 오른손을 움직이던 자성은 얼마 움직이지 못하자 짜증을 내며 손을 흔들었다.
"되는게 하나도 없네."
몸을 비틀고 왼손을 뻗어 대충 덧대어진 판자를 뜯어내었다. 쏟아지는 햇빝에 자성은 눈을 찌푸리며 그 틈으로 보이는 바깥을 바라보았다. 먼지와 얼룩으로 얼룩진 창문으로 보이는 바깥은 붉은 벽돌의 벽이었다. 다른쪽 벽을 보기 위해 움직이려던 자성은 앓는 소리를 내며 자신의 오른손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경찰서에서도 헐렁하게 채우는 수갑을 딱 맞게 채워놓은 걸 보면 수갑의 단점을 알고 있는 경찰이 채운건 아닐까 추측했다. 수갑의 빈 공간이 손을 움직일수록 점점 좁아지며 결국에는 손목을 파고들 정도로 달라붙게 되었다. 반대편을 붙잡고 침대를 부숴보려고 했지만 침대의 다리만 찌그러질 뿐 매트를 고정하는 틀은 변함이 없었다.
“씨발!”
카릉.
자성의 거친 발길에 삐뚜름하게 기울어진 간이침대가 신경질을 내듯이 날카롭게 울었다. 자성이 가볍지 않은 침대를 거칠게 손으로 끌자 날카로운 금속이 시멘트 바닥에 긁히는 거친 소리가 들려왔다. 벽 앞에 선 자성이 창문을 가리는 판자를 뜯자 판자들 틈으로 아래로 보이는 나무와 풍경에 헛웃음이 나왔다.
2층...
자성은 몸을 돌려 의자에 가까이 다가가 펼쳐진 잡지를 살펴보았다. 십자말풀이 페이지가 펼쳐져 있었지만 아무것도 쓰여있지 않았다. 자성이 허리를 굽혀 자유로운 왼손으로 잡지를 거칠게 넘기며 살펴보다가 익숙한 얼굴이 머리에 떠올랐기에 표정을 구겼다. 잡지를 불 속에 집어넣기 위해 집어든 순간 오른쪽 귀 뒤쪽에 닿는 서늘한 느낌에 몸을 굳혔다.
“엉망이네.”
들려오는 목소리에 자성이 어깨 너머로 고개를 돌리자 마네킹 같은 얼굴이 보였다. 그리고 자신을 위협하던 물건의 정체도.
"......"
자성은 자신을 협박하던 물건이 권총이 아닌 볼펜이었다는 것에 자존심이 상한 듯 얼굴을 구겼다.
“또 보네요. 이자성씨.”
“강과장이 중국까지 당신을 보냈을 리는 없을 것 같은데."
남자는 짧은 인사만하고 자성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자성의 손목을 잡아당겨 수갑을 풀었다.
카랑.
남자의 손길에 무거운 침대가 바닥에 구르며 신경을 긁었다. 자성은 수갑이 풀리자 손목에 붉은 가죽시계를 찬 것처럼 부어올라 있었다.
“도망칠 겁니까?”
“내가 그쪽에게 알려줘야하나?”
“어차피 갈 곳도 없잖습니까. 밖에는 돌아다니지 않는게 좋을 겁니다.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해요.”
자성의 현재 상태를 명확하게 알고 있는 남자의 말에 웃을 수도 없었다.
누군지 몰라도 자신의 상황을 알고 있는 사람이 남자에게 의뢰를 한 것이 틀림없었다.
“두 발 멀쩡하게 달린 사람이 돌아다니는 건 당연한 거 아닌가?”
“저 문을 나가는 건 두 다리 달린 당신 자유지만, 당신을 노리는 사람들을 잘 피하길 바라죠. 제가 이자성씨를 보호해 줄수 있는건 제가 정한 공간 뿐입니다.”
남자의 말은 군더더기 없이 단호하고 명료했기에 자성은 그가 진실만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자성이 잠시 생각에 빠진 동안 남자는 자성의 손에서 잡지를 뺏어 가방에 넣고 문으로 걸음을 옮겼다. 자성은 자리에 우둑하니 서서 철문으로 걸음을 옮긴 남자의 뒤를 눈으로 쫓았다.
끼이익,
남자의 손에 녹슨 철문이 열리며 저물어가는 강렬한 햇볕을 토해내었다.
남자의 의중을 읽지 못한 자성이 남자를 바라보자 깊게 가라앉은 눈을 마주한 남자가 입을 열었다.
“침대가 망가졌는데, 바닥에서 잘 겁니까?”
"내가 왜 당신 말을 믿어야 하지?"
"이자성씨가 직접 결정하라는 겁니다."
"나한테 선택권이 있긴 한가?"
"어쩔 겁니까?"
"지금 내가 그쪽을 따라가지 않더라도 날 감시할것 같은데. 아닌가?"
자성의 질문에 남자는 또 대답이 없었다.
"하아... 진짜 내 인생은 조용하지가 않네."
크게 숨을 들이쉰 자성은 쏟아지는 햇빛 속으로 걸음을 옮겼다.
"모. 아니면, 도. 이런건 싫은데. 인생 진짜 씨발."
투정이 담긴 자성의 혼잣말에 남자는 피식-하고 웃었다.
-
“그 새끼헌티 잘 붙어 있고. 잉. 난중에 연락허자.”
정청은 고개를 끄덕이며 휴대전화 너머에서 흘러오는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잉. 꼬박꼬박 연락혀라잉.”
정청은 수화기 너머에서 끊겨버린 휴대전화를 힘겹게 귀에서 때어내고 새까맣게 변한 휴대전화의 액정을 손으로 쓸었다. 그 사이에 목적지에 도착했는지 차가 멈춰있었고 운전대를 잡고 있던 재헌이 정청과 인사이드 미러로 시선이 마주치자 그제서야 입을 열었다.
“형님, 도착했습니다.”
“잉. 알었다. 왔으믄 왔다고 어째 똥줄타게 기다리고 있었냐잉.”
재헌은 무언가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정청은 재헌의 말을 기다렸다가 차에서 내려 골프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청이사가 여기까지 무슨 일인가? 골프를 치러 온 것은 아닌 것 같고.”
의자에 앉아 서로의 얼굴을 마주본 장수기와 정청의 사이에는 한 김 식은 찻잔이 놓여 있었다.
“선배님을 찾아오는데 꼭 무슨 용건이 있어야 오것습니까.”
“청이사는 그런 사람이었지. 이이ㅅ... 아니, 이회장 말이야. 랑 다르게 말이야.”
차가 차갑게 식을정도의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정청이 입을 때었다.
“선배님 장수기‘회장님’ 이라고 불리고 싶으시지는 달고 싶지 않으십니까잉.”
“큼! 누가 들으면 어떻하려고 하나.”
장수기의 입가에 다 지우지 못한 미소를 본 정청은 웃음을 참았다.
“제가 헛소리를 허는 것도 아니고, 당연헌 소리를 허는 건디 누가 뭐라 허것씁니까. 본래대로 따지자면 장유유서에 의해서 중구새끼 말고 당연히 선배님이 다음 순서 아니것습니까.”
“어허, 이사람이.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리고 그 개새끼가 사람새끼 아닌건 옛저녁 일이잖습니까잉. 그라고 회장됐다고 중구새끼 뒤만 봐줄 수는 없는 일 아니것습니까.”
“그러는 청이사는 그 자리가 탐나지 않나?"
장수기의 말에 정청은 장수기가 자신에게 하나도 마음을 열지 않고 경계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만만치 않은 늙은이를 어떻게 꼬득여야 좋을지 빠르게 머리를 굴렀다. 표면적인 이유를 더하기 위해서, 자신 대신 머리를 대신할 허수아비를 세우기 위해서 장수기는 꼭 필요했다.
“엥? 즈요? 하하하하! 우리 선배님이 말 겁나 잘허시내요. 즈는 제 식구들 안 굶기고 살믄 되는 새끼입니다. 그런 그릇이 아니여요. 우리 선배님이 겁나 저를 높이 평가허시네요잉. 즈는 우리 선배님 우산 밑에서 조용히 있으면 그걸로 족헙니다. 즈는 왜 그라고 그 머리아픈 자리를 탐내는지 모르것네요잉.”
커피를 한 모금 마신 장수기가 까만 선글라스를 낀 정청의 눈을 마주하며 입을 열었다.
“...이자성, 때문인가?”
정청은 선글라스를 벗어 손에 잡고 장수기를 바라보았다.
역겹고 짜증이 밀려왔지만 지금은 능구렁이 같은 늙은이의 장단에 맞춰 춤을 춰야 했다.
“아니라고는 못허긋네요잉. 선배님 말씀처럼 즈는 회장자리 다 필요 읍습니다. 내 새끼! 내 새끼 디지게 만든 중구새끼 목만 따믄 상관없은께 잘 생각허시길 부탁드립니다잉. 저는 선배님이 거절허시면 선배님 아니더라도, 다른 사람헌티 가서 힘을 빌러더라도 저는 중구새끼 제 손에 꼭 디지는 꼴을 봐야 되것습니다. 그리고 선배님이 강과장 허고도 손 잡으신거 알고 있습니다.”
정청의 마지막 말에 장수기는 정청의 날카로운 시선을 피하며 식은 커피를 한 모금 더 목으로 넘겼다.
“즈도 그짝에 파이프 좀 꽂아 봤거든요잉. 생각지도 못헌 것들이 막 빨려올라오드라구요잉.”
“큼, 다음에 시간 내도록 하지.”
“예, 긍정적인 답인줄 알고 먼저 일어나것씁니다잉. 즐겁게 운동하셔요잉.”
정청은 골프장을 빠져 나오며 목에 걸린 가래침을 뱉어내었다.
“카악! 퉷!! 씨발, 벽에 똥칠헐때까정 살아갖고 뭐할라고 그랄까잉. 인자 늙은이 궁딩이에 불붙어갖고 요기저기 미친듯이 돌아다니것구마. 킬킬. 씨발. 나를 무시허믄, 큰 코 다쳐요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