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까지 자성에 대해서 어중간한 태도를 취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자신의 성격에 맞지 않은 일이기도 했고, 몇 시간 이후에 얼굴을 마주해야 할 사람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8년을 자신의 등 뒤를 지켜왔던 남자였다. 쉽게 내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씨발.”
‘느 적에 둘러 싸여서 두 다리는 한번이라도 뻗어보고 잠들어 본적은 있냐.’
자성의 경찰 인사기록을 본 순간 정청은 그 사실이 그렇게 놀랍지는 않았다. 8년 동안의 세월간 자성이 자신에게 무언가 숨기고 있다는 것을 알아 차리는 것은 어렵지 않았었다.
자성에 대한 감정은 분노를 넘어 동정심이 들었다.
적들 가운데에서 하루하하루를 보내는 것이 자성에게는 고역이었을 터였다.
서울에 올라와 자성의 지위가 올라가고 몸을 움직일 일은 적어졌지만, 서울물이 맞지 않는 건지 그의 몸은 더 말라가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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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발 딛을 곳 없이 내리던 어느 날, 젖은 옷을 털어내느라 겉옷을 벗어 털어내는 자성의 몸을 본 적이 있었다. 흰 셔츠가 몸에 달라붙어 전보다 마른 허리가 모습을 들어내었었다.
‘씨발, 느 무신 걱정 있냐잉.’
정청은 수척해 보이는 자성이 쓰러지지 않을까 걱정이 밀려왔다. 안 그래도 골드문 안에서 북대문파의 세력을 확보하기 위해서 과도한 일을 처리하느라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는 하루하루였다. 건강했던 자성에게 언제부턴가 신경성 위염이 생겼고 골드문 안에서 자신들의 세력이 커질수록 자성의 얼굴을 하루가 다르게 반쪽이 되어 갔다. 자성의 딱 맞던 정장의 소매에 빈 틈이 보이는 것을 느끼던 차였다.
‘없소.’
자성은 언제나 찬바람처럼 정청에게서 돌아서며 겉옷을 챙겨 입었고 정청은 눈을 깜빡이면 사라질 것 같은 신기루 같은 뒷모습에서 시선을 때어내지 못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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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 지랄같구마잉.”
‘느 그래서 서울 올라와서는 점점 죽을 것처럼 말라갔던 게 그 이유 였냐잉. 느 어떻게 살았냐잉. 지옥 같은 세상에서 어뜨게 살았냐잉. 자성아.’
정청은 쓰디 쓴 소주를 목으로 넘겼다. 목을 적시며 넘어가는 술이 느껴졌지만, 갈증은 오히려 더 심해지는 것을 느꼈다.
탁-.
정청의 손에 의해 던져지듯 속을 비워낸 종이컵이 플라스틱 야외탁자 위로 맑은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크- 씨부럴. 맛이 좆같네잉.”
‘난 느 못 놔줘야잉. 절대로 못 놔. 난 느 두 다리를 뽄질러서라도 여기 주저앉힐 거여. 씨발놈아.’
결정을 내린 정청의 흔들리던 두 눈동자가 초점을 찾았고, 아래로 처져 있던 입술이 반달 모양으로 휘어지며 호쾌한 웃음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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툭툭 무심하게 떨어지던 비가 제법 굵어져 바짓단을 축축하게 적셨다. 자성은 석무가 씌워주는 우산을 쓰고 커다란 창고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자성은 오늘따라 몸에 감긴 옷의 무게가 유난히 무겁게 느껴졌다.
흐릿한 주황색의 전등이 핏물이 칠해진 것처럼, 창고 안을 밝히고 있었다.
“어따, 브라더, 쪼까 늦었다잉.”
“거... 알잖소, 퇴근시간에. 비까지 와서 늦었소.”
“그려, 씨발, 느라믄 내 말에 좆빠지게 튀어 왔겄제.”
너스레를 떨며 웃는 정청을 바라보며 같이 웃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자신이 발을 딛고 서 있는 이 창고는 주로 사람을 처리 할 때 쓰는 곳이었기에.
몇 일 전, 자성은 이 곳에서 프락찌로 의심되는 이사 하나를 콘크리트로 굳혀 묻혀버렸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둘러보니, 정청의 옆에는 자신을 노려보는 양변호사와 옷차림새가 거지처럼 허술한 사람 셋이 서 있었다.
“여기까지 왜 불렀소.”
의자에 앉아있는 정청은 불빛을 등지고 있었다. 덕분에 정청의 얼굴에는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마주 선 자성의 눈에는 정청의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자성은 불안감으로 자꾸만 빠르게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정청의 앞으로 걸음을 내딛었다.
“내가 말했잖혀, 써프라이즈 할게 있다고. 씨발.”
정청은 아까 마신 싸구려 소주가 다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 머리는 각성제를 먹은 것처럼 오히려 더 또렷했고 자신에게 다가오는 자성의 흔들리는 표정이 선명하게 두 눈에 각인되어 왔다.
정청이 손짓하자 정청의 등 뒤에 헤드라이트를 켜고 있던 지게차가 가까이 다가왔다.
“씨발, 느 저 드럼통에 뭐가 들어 있는지 좆나게 궁금하지 않냐. 이번 선물이, 씨바. 브라더 마음에 들지 모르것다. 어여 봐봐야. 굼벵이처럼 깨작깨작 움직이지 말고.”
정청은 평소와 다름없이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노력했지만 입에서 쏟아지는 목소리는 정청의 머리를 따라가지 않았다.
웃음 뒤에 느껴지는 싸늘한 정청의 목소리에 자성은 손바닥에 땀이 흥건하게 젖는 것을 느끼며 지게차로 한 걸음씩 다가갔다.
퉁.
대충 덮어 둔 뚜껑을 손으로 가볍게 밀쳐내자 온 몸이 피범벅이 된 여자가 들어 있었다. 얼굴이 익숙하다고 느낀 순간, 드럼통 뚜껑이 바닥에 떨어지며 요란한 소리를 내었고 그 소리에 맞춰 자성은 심장이 땅바닥으로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입을 막은 테이프 사이로 흐느끼는 비명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자성은 비명조차 내지르지 못할 정도로 놀라 몸을 굳히고 신우를 멍청하게 바라보기만 했다.
자성의 몸짓을 두 눈으로 쫓은 정청은 고양이 앞의 쥐처럼 어색하기 짝이 없는 자성의 행동에 피식- 웃음이 새는 것을 느꼈다.
‘느, 그렇게 당황해서 8년동안 어떻게 쁘락지 노릇을 해왔냐. 자성아. 이 씨발놈아.’
“씨발, 스펙타클하게 써프라이즈 해불제? 느 바둑선생 몸매가 겁나 튼실해야. 씨발년.”
자성은 온 몸의 피가 싹 말라버린 것을 느끼며, 바싹 말라 까쓸한 혀를 움직여 간신히 입을 열었다.
“이게... 무슨....”
정청이 양변호사에게 손짓하자 양변호사가 등기서류봉투를 정청의 손에 건네주었고 정청은 의자에서 일어나, 자성에게 다가가 서류를 건네주고 손을 들어 자성의 뺨을 가볍게 두드렸다.
“씨발. 이거 보믄 니도 알게 될거여.”
가까이에서 마주한 정청의 얼굴에는 웃는 입술과 대조되게 다갈색 눈동자가 싸늘하게 굳어 있었다. 자성은 정청의 거친 손이 자신의 뺨을 스치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 채 까만 눈동자를 급하게 굴리며 지금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애를 썼다.
“이 씨발년이 어떤 새끼랑 붙어먹었는지 절대 말을 안해야. 존내 파이팅 있는 년이여. 씨발. 좆 달린 새끼들 보다 훨 나아야. 캬악-. 퉷!”
자성은 드럼통 안에 있는 신우에게 가래를 뱉는 정청에게서 시선을 때고, 자신의 손에 쥐여진 등기 봉투를 열어 내용물을 꺼내었다. 하얀 A4용지 위에 적혀있는 ‘경찰 인사기록부’ 라는 제목에 이마와 등으로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아따, 싸게 싸게 봐라잉.”
자성은 정청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을 느끼며 손에 쥐고 있는 서류를 넘기지 못했다. 서류를 쥐고 있는 손이 새하얗게 질린 채 자신의 의지를 벗어나 덜덜 떨리고 있었다.
분명, 이 서류에 자신의 기록도 있을 터였다.
자성은 자신의 손에 쥐어진 서류를 투시할 것처럼 바라 볼 뿐, 제목이 쓰여진 첫 장을 넘길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