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에 취해 얕은 잠을 자던 자성이 누군가가 곁에 있는 것을 느끼고 눈을 떴다. 흐린 시야에 낯선 사람이 보이자 순식간에 잠을 떨쳐내고 눈에 힘을 주었다.
“깼냐.”
중구는 자신이 가깝게 다가가자 죽은 사람이 돌아 온 것 처럼 번쩍 눈을 뜬 자성의 모습에 약간 놀라며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자성은 자켓에 단추 세 개가 나란히 붙어 있는 베스트까지 껴입은 익숙한 남자의 모습에 입을 열었다.
“...중구형이... 여기까진 무슨 일이오?”
자성이 몸에서 잠을 떨쳐내고 몸을 일으켜 앉으며 중구의 얼굴에서 의중을 읽으려 했다.
“지나는 길에 잠깐 들렀다. 짱개새끼는 안 보이는군.”
느리게 병실을 둘러보며 건내는 중구의 말에 자성은 호흡곤란을 일으킨 그날 이후로 얼굴을 보이지 않는 정청의 소식을 물어보려다가 생각을 떨쳐내었다.
“생각해 줘서 고맙소. 중구형.”
“짱개새끼랑, 싸웠냐.”
자성은 정확하게 알아맞춘 중구의 말에 대답을 쉽게 할 수가 없었다. 주경이에 대해서 이야기 한 이후로 정청은 자신이 자고 있을 때만 다녀가는 모양인지 자고 일어나면 테이블 위에 물건이 하나씩 늘어난 것을 보고 짐작할 뿐이었다. 그것도 정청이 사다 두는 것 이 아닐 수도 있었지만, 환자에게 도수가 54도나 되는 마오타이주를 선물하는 건 아마 정청밖에 없을 것 같았다.
“......왜 그러오.”
“짱개새끼가 빨빨거리면서 돌아다니지 않으니 좋긴 하지만, 병든 닭 마냥 늘어져 있는 꼬라지가 눈에 거슬리니까.”
“대신, 사과 하겠소.”
자성은 중구가 괜한 트집을 잡으러 병원까지 온 건가 싶었다. 자성의 사과에 중구의 입술이 무슨 말을 하려다가 다시 입술을 꾹 다물었다.
“이건, 뭐냐.”
입술을 굳게 다물고 있던 중구가 인상을 찌푸리며 이불 사이로 빼꼼 몸을 내민 다홍색의 털 뭉치를 발견하고는 손으로 가리켰다. 중구의 손을 따라 시선을 움직인 자성은 눈에 익은 털뭉치에 다급하게 이불속으로 감추었다.
“아,아무것도, 아니오.”
자성의 당황한 모습에 자성의 이불 속에 모습을 감춘 털뭉치에 대해서 더욱 궁금해진 중구가 익숙하게 입을 열었다.
“흠, 저건...?”
“뭐 말이오?”
중구가 창문 밖으로 시선을 옮기며 의아해 하자 자성의 시선도 중구의 시선을 따라 움직였고, 중구는 자성이 잠시 다른 곳으로 시선을 옮겼을 때를 놓치지 않고 이불 안에서 털뭉치를 꺼내었다.
"주,중구...혀!!!"
중구형이라는 말이 다 만들어지기도 전에 털뭉치는 중구의 손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이런게 취향이었냐.”
“그런 거 아니오!”
중구의 손에 들려 있는 건 아기의 베개처럼 둥글 넓적하게 생긴 눈을 감고 있는 천이 보드라운 양 인형 이었다.
제법 크기도 커서 팔뚝만한 크기였다. 품에 안으면 꽤 괜찮을 듯 했다.
“짱개새끼가 줬냐?”
인형을 살펴보고 있는 중구의 시선에 자성은 쥐구멍에 숨고 싶었다.
저 인형도 누군가 놓아두고 간 선물 중에 하나였는데, 물론, 그 누군가는 정청임을 모르지 않았다. 그가 아니라면 자신이 누워 있는 침대에 그것도 얼굴 옆에 무언가를 놓아 둘 생각을 할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그것도, 인형을 말이다.
보드라운 털을 가진 양 인형은 설명서가 있었는데, 인형의 안에 있는 물통에 정수기나, 끓는 뜨거운 물을 넣고 옆구리에 있는 주머니에 손을 넣으면 따뜻해진다는 간결한 설명이 쓰여 있었다.
“그런거 아니오. 그거, 빨리 돌려 주시오.”
그냥 실험 삼아 정수기의 뜨거운 물을 넣어 잠깐만 안고 있는 다는 게 제법 따뜻해서 푹 잠들어 버린 기억이 뒤늦게 떠올라 왜 자신이 그런 짓을 했는지 접시 물에 코라도 박고 싶었다.
자성의 말에 중구의 한쪽 입술이 비틀려 올라갔다.
“이이사가 이런 취향일 줄은 꿈에도 몰랐군. 다음부터 참고 해야겠어.”
“그런 거, 아니라고 하지 않소. 중구형.”
비꼬는 중구의 말에 자성은 절대 아니라고 반박하고 싶었지만, 명백한 증거가 눈앞에 있으니, 자신의 말은 씨알도 먹히지 않을 것을 짐작 할 수 있었다. 소문이라도 안 나면 다행일 것 같았다.
“자.”
중구가 던지듯 인형을 자성에게 주었고 자성은 자포자기 심정으로 그냥 인형을 허벅지 위에 얹혀 놓았다. 아직 따뜻한 체온이 느리게 허벅지를 감쌌다.
“뭐, 더 할 말이라도 있소?”
중구가 무언가를 말하려다가 입술을 다물었다. 자성은 용건이 남았는지 자리를 뜨지 않는 중구를 바라보았다.
“아니다.”
중구는 입술을 다문 채 자켓의 단추를 풀고 간이 의자에 앉았다. 앉은 폼이 쉽게 떠날 것 같지가 않았다.
자성은 곁에 자리를 잡은 중구 때문에 약에 취해 내려오는 눈꺼풀을 이겨내며 멍하니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톡.톡.톡.
묵직한 지포라이터를 병실 침대 틀에 일정한 박자로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오는 게 생각에 잠긴 것 같았다.
“.....다음에.”
인형의 온도와 약기운에 꾸벅꾸벅 졸던 자성이 중구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옆을 돌아보았다. 중구의 손이 멈춰 있었고 눈동자가 라이터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밥 한 끼 같이 먹자.”
“예...?”
“그때 보자.”
자성과 시선을 마주친 중구가 자리에서 일어나 병실 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묵직한 걸음소리가 멀어져갔다. 자성은 자신이 잠결에 헛소리를 들은 건가 싶어 병실을 나서는 중구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