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병실에 자성의 머리맡에 있는 스텐드의 불빛만이 병실을 밝히고 있었다. 도둑처럼 뒷꿈치를 들고 까치발로 들어온 청은 손에 든 선물을 낮은 탁자 위에 내려놓고 자성이 잠든 침대를 물끄럼 바라보았다.
스텐드의 희미한 불빛에 자성의 실루엣을 본 정청은 자성의 얼굴을 조금만 보고 갈까 싶어 최대한 발을 들어 소리 없이 침대 곁으로 걸음을 옮겼다.
'꿀꺽.'
자신의 침 삼키는 소리가 귓가에 울리자 괜히 긴장이 되었다. 발걸음 소리와 심장소리가 귀 바로 옆에서 울리는 것 처럼 너무나 크게 들려와 자성이 눈을 뜨지 않을까 불안감에 휩싸였다.
“씨벌.”
겨우 침대 곁에 서게 된 청은 가만히 자성의 얼굴과 몸을 살폈다.
조금, 더 나아진 걸까?
손을 뻗으려다가 잠이 깰까봐 살결도 쓸지 못하고 침대 틀을 손으로 잡았다. 그렇게 눈으로만 내려 보던 청은 이불 사이로 자신이 두고 간 인형이 자성의 옆구리를 지키고 있는걸 보고 헤픈 웃음을 흘렸다.
“변태요?”
“워매!!!! 씨발! 느 내가 콱 디져부렀으면 좋것냐!”
자성의 목소리에 정청은 펄쩍 뛰며 물러나 펄쩍펄쩍 뛰는 심장을 진정시켰고, 어느새 눈을 뜬 자성이 한심하게 청을 바라보았다.
“안 죽었잖소.”
“말 헌 번 싸늘허다. 씨발. 안자고 뭣허냐.”
“일 끝내고 오는 길이오?”
“보믄 모르것냐.”
자성은 고생했다고 말하며 손을 뻗어 정청의 손을 잡을까 하다가 그냥 시선만 한번 주고 말았다.
‘더 이상 정 주지 말자.’
청과 지내는 8년간 항상 하던 생각을 다시 되내이며, 자성은 시선을 돌려 어둑어둑한 천장을 바라보고 눈을 감았다.
“가요. 잘테니.”
“씨발, 오랜만에 본 형님인디 잘 지냈냐는 인사도 안 허냐.”
섭섭함이 느껴지는 정청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자성은 일부러 눈을 뜨지 않고 고개를 벽 쪽으로 돌렸다.
“썩을 놈. 간다 가.”
정청의 발소리가 멀어지고 문이 열렸다가 닫히는 소리가 나자 자성은 감았던 눈을 떴다.
“하아-.”
벌어진 입술 사이로 고독한 한 숨이 흘러 나왔다.
고개를 돌려 본 텅 빈 병실이 유난히 어두워 보였다.
다시 눈을 감고 잠을 청해 보았지만, 여러 가지 생각에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자신과 취향이 맞아 많은 것을 공유했고, 사랑까지 나누었던 여자가 사실은 강과장이 자신을 마킹하라고 붙여놓은 여자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자신을 잘 파악한다고 생각 했던 자신의 수하도 자신을 마킹하라고 붙여놓은 경찰 이었다는 사실에 더 이상 무엇을 믿어야 할지 알 수 가 없었다.
“흐읍...”
언제나 그랬지만, 또 다시 세상에 혼자 떨어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있다가 없어진 것의 차이는 생각보다 훨씬 커서, 어렸을 적 부모님이 모두 사고로 돌아가신 이후처럼. 세상에 혼자 내동댕이 처진 기분이었다.
다신 떠올리고 싶지도 않은 기억까지 떠올라 자성은 눈가가 뜨겁게 열이 오르는 것을 느끼며 팔을 들어 눈을 꾹 눌렀다.
달칵.
갑작스럽게 하지만 조용히 문이 열리는 소리에 자성은 황급히 기억에서 벗어나 방문객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씨부럴, 잘도 퍼잔다.”
자성은 익숙한 목소리에 가만히 잠든 척 했다.
갑자기 이마를 짚는 손에 깜짝 놀라 몸을 움찔 떨었다. 두텁고 거친 손바닥이 이마를 쓱- 쓸어 넘겼다.
“열은 없고만, 씨벌, 와 몸이 차냐. 일본제라고 샀더만,”
궁시렁거리는 정청의 말과 함께 옆구리에 따뜻한 온도를 가진 것이 놓였다. 자성은 꾹 눌렀던 눈물이 울컥. 터지려는 것을 느꼈다.
입술을 꽉 물며 어떻게 해서든 참아보려고 했지만, 흔들리는 어깨와 입술사이로 흘러나가는 울음소리를 막을 수가 없었다.
자성이 감았던 눈을 뜨고 팔을 뻗어 뒤돌아 병실을 나서려는 정청의 옷을 붙잡았다.
“워메? 느 와그러냐. 씨발, 상처가 아프냐???”
정청은 자신의 옷깃이 당겨지는 느낌에 뒤를 돌아보았고 두 눈을 새빨갛게 물든 채 자신을 올려보는 자성의 두 눈동자를 본 순간 한 걸음에 자성의 곁으로 바짝 다가섰다.
자성은 정청의 옷깃을 손에 움켜잡은 채 참았던 울음을 쏟아 내었다.
“옴마???”
정청의 검은 손이 붉게 물든 눈 아래를 쓸었다.
자성의 희멀건 얼굴에서 눈물이 지워졌다.
“독해져라. 느 그렇게 물러 터져서 여서 어떻게 버틸려고 허냐.”
정청은 어린 아이처럼 눈물을 보이는 자성의 얼굴을 조심히 감싸 눈물을 지워주었다.
손에 힘을 가하면 곧이라도 부숴질 여린 얼굴이 어리광을 피우 듯 손바닥에 부벼왔다.
“느, 많이 힘드냐,“
청이 흐느낌을 흘리는 자성의 입술을 쓸었다. 하얗게 일어난 입술이 거칠게 손끝을 긁었고 미지근한 체온을 가진 눈물이 손을 적셨다.
자성은 자신의 흐린 눈 앞에 있는 정청의 까만 얼굴을 바라보며 안도 했다.
지난 8년 동안 자신의 곁에 있어준 사람, 자신의 등 뒤를 지켜주었던 유일한 사람이 눈 앞에 있었다.
모든 것이 짙은 안개에 휩싸인 것 처럼 뿌옇고 불확실한 세상에, 오직 정청만이 자신에게 모든 것을 보여주었고, 믿어주었다.
자신의 모든 삶이 부정당해도 그 만은 자신을 받아 줄 사람 이었다.
어쩌면, 강과장과 손을 잡은 순간부터 길은 단 한가지 뿐이었을 수도 있었다.
머리에서는 냉정하게 모든것을 정리했지만, 자성의 마음은 여전히 갈피를 잡지 못했다.
복잡한 생각들에 머리가 텅 비어버리더니 눈에서는 눈물만이 쏟아져 나왔다.
‘조금만 버텨라잉, 조금만 버텨. 나가 디지더라도 느는 지켜줄 텐께.’
정청은 말없이 자성의 눈물을 쓸어주었다.
자성은 자신의 뺨을 감싼 조심스러운 손길에 미안함과 죄책감을 느끼며 가만히 눈물만 떨구었다. 미안하고, 또 미안했다. 그 마음을 말로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