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성은 몸을 혼자 거동할 수 있게 되자 서둘러 퇴원 수속을 밟고 집으로 향했다. 자신이 없는 동안 골드문이 어떻게 변했는지 강과장과 연락해야 했다.
하필, 장수기가 회장자리에 올라 있다니.
그는 강과장에 의해 자성의 정체를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힘이 없는 그는 자성이 비밀경찰이라는 사실을 가지고 자성을 협박하고도 남을 위인이었다. 약점이 잡힌 자신은 이빨과 발톱이 몽땅 뽑힌 늙은 여우의 주둥이에서 나오는 꾀를 쉽게 무시할 수가 없었다. 그가 자신을 협박한다면, 자성은 그의 명령에 따라야 할 수 밖에 없을 지도 몰랐다.
정청은 무슨 생각으로 장수기를 회장 자리에 앉힌 걸까.
아마도, 바지사장으로 내민 것 같았지만. 그는 장수기와 자신 사이의 비밀을 모르기에 그런 결정을 할 수 있을 터였다.
“하아...”
자성은 복잡하게 끓는 머리를 식히기 위해 차가운 차창에 이마를 대었다.
무심하게 닿은 자성의 시야에는 꽃을 보며 걸어가는 가족이 스쳐 지나갔다.
-
청은 자성의 얼굴이나 볼 생각으로 병원으로 걸음을 옮겼다. 병실 앞을 지키는 수하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의아하게 생각하며 익숙하게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하지만, 아무도 없는 텅 비어있는 병실만이 자신을 반겼다. 청은 다시 병실을 빠져나와 병실 문을 바라보았다. '이자성'이라는 세 글자가 사라진 명패를 그제서야 발견하고 간호사들이 있는 곳으로 다가가 확인을 하고 나서야 자성이 퇴원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청은 미리 알리지 않은 자성의 행동에 대해 섭섭함을 느끼며 차를 돌려 자성의 집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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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관에 선 자성은 손을 뻗어 도어락을 열어 익숙한 번호를 눌렀다. 숨을 들이쉬고 현관문을 열자 자신이 잠시 들렀을 때 적셔서 놓아두었던 수건이 현관에 그대로 말라붙어 있었다.
자성이 몸을 구부려 분홍빛으로 물든 수건을 걷어내었다.
“후-.”
굽힌 몸에서 통증이 밀려오는 것을 느끼며 숨을 들이쉬며 몸을 일으켰다.
“형님.”
아직은 엣되어 보이는 뒤따라 붙은 수행원이 자성이 몸을 가누는 것을 도와주었다.
“이름이 뭐랬지?”
자성은 자신보다 키가 작고 아직 어려보이는 수행원을 보고 입을 열었다.
“왜 그러십니까?”
자성의 물음에 순해 보이는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고 자성은 그 얼굴을 보며 무심하게 입을 열었다.
“큰 형님 명령으로 내 옆에 붙어 있을 텐데, 부를 때 마다. ‘야’라고 할 수는 없잖냐.”
“아, 곽. 진석입니다.”
“진석. 곽진석. 너도 화교출신이냐?”
“예.”
“고생 많았겠다.”
자성은 풋풋한 그에게서 자신과 처음 만났던 석무의 모습이 겹치는 것을 느끼며 씁쓸하게 웃었다.
“아무래도, 나 대신에 큰 형님한테 많이 맞을 거라서 형들이 막내인 널 보낸 모양이다.”
“예?”
자성은 자신을 순수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진석의 목소리를 뒤로 하고 베란다 문을 열었다.
높은 곳의 바람이 불어와 바닥에 있는 먼지를 긁어 허공에 뿌렸다.
"차에 가서 쉬고 있어. 필요하면 부를 테니까."
"아닙니다."
군기가 바짝 든 진석의 모습에 아무래도 억지로 때어 내는 건 무리 일 듯 싶었다.
"그럼, 심부름 하나만 부탁 하자."
"예."
"슈퍼에 가서, 쓰레기 봉투 제일 큰 것 좀 사와."
"네?? 네. 알겠습니다."
진석이 대답하고 집을 나서자 자성은 서재로 가서 유심칩을 숨겨놓은 서랍을 열어 서랍의 바닥을 손바닥으로 더듬었다.
다행히 자신이 붙여 놓은 유심칩이 붙어 있었다.
자성이 휴대전화를 분해해 유심칩을 갈아 끼우고 휴대전화를 켰다.
지잉-
단 한통의 부재중 통화가 있었다.
익숙한 번호였다.
자성의 손가락이 그 위에서 맴돌며 쉽게 전화를 걸지 못했다.
경찰 기록이 없어진 지금, 그만 끊어내도 될 사람이었다.
한참을 망설이던 자성은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며 통화 버튼을 눌렀다.
[살아 있었냐.]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덤덤한 목소리에 저절로 인상이 구겨졌다.
"어떻게 된 겁니까."
[정청이, 장수기를 회장으로 추대했다. 그건 알고 있을 거고.]
"그럼, 이제 다 끝난겁니까."
[결론 난게 하나도 없는데 끝이라고 말하기에는 성급한 것 같다.]
형철이 말했던 것 처럼 장수기가 회장이 되었다. 그 외에 도대체 뭐가 있다는 말일까.
"뭐하자는 개수작 입니까. 이제 과장님은 저한테 이래라 저래라 할 입장이 못 된다는 거 알잖습니까."
자성의 신경질적인 목소리에도 형철은 무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구과장, 나, 네 경찰 학교 스승. 너랑 같이 근무했던 동기들이 나서면 경찰 신분, 복귀시킬 방법도 있다.]
"그게, 무슨..."
형철의 말에 자성은 휴대전화를 세게 움켜 쥐었다.
[넌 경찰이야. 이자성. 잊지마라.]
이처럼 달콤한 말이 어디 있을까.
자성은 자신이 너무나 멀리 걸어와 버렸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형철의 말에 흔들렸다.
[다음 출장소는 21일에 문자로 넣어주마.]
자성이 머뭇거리는 사이 형철이 전화를 끊었다.
자성은 귀에 대고 있던 휴대전화를 내리고 힘없이 의자에 주저 앉았고, 아무런 대답이 없이 까맣게 죽어버린 휴대전화를 손아귀에 꽉 움켜쥐었다.
아무것도, 변한 것은 없었다.
띵-동.
적막을 깨우는 초인종 소리에 정신을 차린 자성은 손을 재촉해 서둘러 유심칩을 교체하고 현관 문을 열어주었다.
"으따, 씨발. 집에다 꿀처발라 놨냐."
열린 현관 틈으로, 이 순간 제일 보고 싶지 않은 청의 까만 얼굴이 불쑥 집 안으로 들어와 어지럽혀져 있는 거실을 쓱- 둘러보았다.
"흐미, 도둑도 이런 상도둑이 없것네. 싹 털어갔네잉.
“엘리베이터에서 큰형님을 만났습니다. 형님. 이거."
자성은 진석이 건네는 관급봉투 뭉치를 받아 들고 청에게 몸을 돌려 침실로 향했다.
청은 그런 자성의 뒷모습을 한번 바라보고는 현관에 뻘쭘하게 서 있는 진석을 발에서부터 머리끝까지 몇 번을 훑어보았다.
“씨빠, 넌 새로 보는 얼굴이다?”
“곽진석이라고 합니다. 형님.”
“그랴그랴."
청이 무심하게 손을 올려 진석의 뒷통수를 툭툭 가볍게 치고는 발걸음을 옮겨 방으로 향했다.
불도 켜져 있지 않은 방에 자성이 쓰레기봉투를 한 손에 들고 주경의 물건들을 버리고 있었다.
“씨벌, 느는 입이 삐뚤어져 붓냐. 어째, 퇴원했다는 소리도 안 허고 왔냐잉.”
“못하게 할거잖소.”
자성은 청을 돌아보지도 않고 분주하게 방을 정리하며 말했다.
화장품과 옷가지를 버리며 반 이상이 비어버린 서랍들을 보니, 주경의 빈자리가 느껴졌다.
“씨벌놈, 싸늘허긴. 느처럼 구신의 집이 따로 없구만.”
청이 성큼성큼 걸어 방 안으로 들어와 넓은 침대에 걸터앉았다.
푹 꺼지는 침대의 느낌이 마음에 들어 몇 번 엉덩이를 들썩이며 쿠션감을 확인하다가 몸을 뒤로 눕혔다.
“으따~. 침대가 겁나 좋아부네, 씨바, 병원 침대가 돌이구먼 돌! 이라니께, 느가 집에 오고 잡다 혔제.”
자성은 침대에서 뒹구는 청의 모습을 흘끗 곁눈으로 확인하고 청을 피해 걸음을 옮겨 드레스룸을 치웠다.
성인 남자 하나가 들어갈 만한 크기의 100L 봉투가득 쓰레기가 찼고, 자성이 다른 봉투를 가져올 겸 드레스룸에서 나왔다.
“크어-”
자신과 주경이 쓰던 침대 위에 청이 아까와 같이 팔을 벌린 자세로 코까지 골며 잠들어 있었다.
자성은 그 모습이 우스워 가만히 다가가 지켜보았다.
'나 경찰이오. 그걸 알고도 이렇게 내 앞에서 잘 수 있소?'
제 앞이라서 이렇게 풀어진 건지, 아니면, 본래 이런 건지 알 수 없었다.
청은 자신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이렇게 자유분방했으니 아마, 후자 일 터였다.
자성은 청이 부러웠다.
다른 짓 하지 않고 주먹 하나로, 여기까지 올라온 사내였다.
그런 청에게 한 편으로는 존경을, 한편으로는 경애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에 비례한 죄책감도 함께.
“........”
자신이 하려던 일을 마저 마무리하기 위해 시선을 옮긴 자성은 청의 발의 움직임에 따라 찍혀진 구둣발자국을 발견하고는 발을 뻗어 청의 다리를 툭툭 건들었다.
“형님.”
“으잉? 씨벌! 무슨 일이여.”
잠이 덜 깬 눈이 짙은 쌍꺼풀을 만들며 자성을 바라보자 자성은 웃음이 나오는 것을 참으며 청의 발을 가리켰다.
“형님이 어지럽힌 건, 형님이 치우소.”
“응?”
자성이 화장실에 있는 수건을 가져와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하는 청의 허벅지 위로 던졌다.
“으미...??? 씨발, 이게 뭐다냐?”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자신을 바라보는 청의 시선에 자성은 청의 신발자국이 선명한 바닥을 손가락으로 가리킬 뿐이었다. 침대 맡까지 찍혀 있는 청의 신발자국이 꼬리처럼 청의 신발에 붙어 있었다.
-
“하, 씨벌!! 나 더 이상은 못허것다. 집이 허벌라게 넓어야.“
정청이 흰 바지를 무릎까지 걷어 올리고 언제나 풀고 다니는 와이셔츠 소매도 어깨까지 걷어 올린 채 땀범벅이 되어 한 손에는 걸레를 쥔 채 거실 한 중앙에 큰 대(大)자로 뻗어 있었다.
“고생했소.”
진석과 함께 방을 치우다가 엄살을 피우는 정청의 목소리에 거실로 향한 자성이 냉장고에 있는 주스를 유리잔에 따라 건네주었다.
“쥬쓰가 뭐냐, 션~한 맥주라도 줘야제!”
“마시기 싫으면 말고.”
자성을 향해 투정하는 정청에게 내밀었던 유리잔을 거두자 정청이 자성의 발목을 움켜잡았고 순간 중심을 잃고 휘청인 자성이 인상을 쓰며 정청을 노려보았다.
“내가 언제 마시기 싫다고 혔냐.”
순간 욱- 화가 치밀어 올라 발로 한 대 쳐버릴까 심각하게 고민하던 자성은 지나는 똥개마냥 자신을 올망졸망 바라보는 정청의 눈동자에 허허. 하고 웃는 수밖에 없었다.
“야. 부라더.”
“왜요.”
“느, 나랑 같이 살자.”
“징그럽게 무슨 남자랑 같이 살아.”
“씨발! 느 여수에서는 같은 방에서 잤잖어! 그걸 그세 홀랑 까먹었냐! 씨발놈아!”
“그건 그때고.”
“내가 집안일은 걱정 안하게 해줄텐께. 느 손꼬락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게 해줄텐께. 씨발. 이 형님만 믿어라잉.”
“됐다니까.”
“씨빠, 브라더. 느 형님 부탁을 요로코롬 칼같이 거절허냐.”
“보니까 걸레질도 잘 못하는구만. 뭐. 쓸대도 없겠네.”
“쿱...!”
“큽-”
재헌과 진석이 웃음을 참기 위해 서로를 팔꿈치로 찔러대는 모습을 보며, 청이 슬렁슬렁 둘에게 다가갔다.
“씨발. 웃냐? 웃어? 웃음이 쳐 나오신가봐요잉. 이 씨발놈들아.”
진석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정청을 피해 뒤로 물러나려 했지만 정청의 손이 더 빨랐다.
정청의 손이 진석의 뺨을 때리더니 진석을 잡고 재헌을 향해 두 다리로 날라차기를 하는 모습을 보고 자성은 변한 것이 없는 일상에 웃음을 터트렸다.
“애들은 왜 때려요.”
“씨벌 저 새끼가 웃잖혀!”
“형님이 웃긴 말을 했나보지.”
자성과 마주선 정청은 자성의 얼굴을 보고 홀린 듯 손을 뻗어 뺨을 쓸었다. 가벼운 웃음을 터트리던 자성이 청의 행동에 놀라며 푸근하게 미소짓는 청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느, 웃는거 참말로 오랜만에 뵌다. 보기 좋구마잉.”
'넌 경찰이야. 이자성.'
자성은 정청의 말에 잊고 있었던 사실이 떠올라 더 이상 웃을 수가 없었다.
청의 손길이 스친 얼굴이, 열려있는 문틈 사이로 지나는 차가운 바람에 싸늘히 얼어 버리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