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의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자성이 그제서야 고개를 돌려 시선을 청에게 옮겼다. 어두운 차 안에서 얼굴의 반을 가리는 까만 선글라스에 가려진 정청의 눈과 시선을 맞추었다.
“정 미안할거 같으면 하지 마시고.”
“하여간 싸늘한 새끼. 딴게 아니고. 갑자기 느 일 터지는 바람에 그 씨바 짱깨새끼들하고 마무리를 못 짓고 돌아왔어야. 몇일이면 된께, 금방 갔다 올라니까, 회사 좀 부탁할게잉?”
“그럽시다 뭐.”
자성은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전과 다름없이 청의 말에 무심하게 대답했다.
차가 멈추고 정장을 입은 사내들이 우르르 내려 공항을 가로 질러 게이트로 향하는 청과 자성의 뒤를 따랐다.
자성은 무전기를 낀 경찰들을 발견하고 눈을 빠르게 움직였다. 무심하게 신문을 읽고 있지만 시선이 여기를 향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기둥 뒤에 선 남녀 한 쌍도 거기에 포함되어 있었다.
무슨 일일까.
장수기가 벌써, 강과장을 만난 것일까?
불안한 듯 주변을 살피던 자성은 자신의 어깨에 팔을 얹는 정청의 행동에 돌라 정청을 돌아 보았다.
“싸게 당겨 올 텐께. 걱정허지 마라잉.”
정청의 손이 생각에 빠진 자성의 볼을 가볍게 툭툭 건드렸고, 자성은 귀찮다는 듯이 팔을 저어 청의 손을 치워내었다.
“그만 좀 해요. 뭘 내내 그렇게 오바를”
“아따, 시부럴, 내가 미안하니까 그런 것 아니냐.”
“아, 그렇게 미안하면 가질 말던가.”
“아따, 또 까칠하게나오네, 그만헐게 이 씨불놈아. 그나저나 장회장, 조심혀라.”
“아-”
“알았다. 안헐께. 뚜이부치, 씨빠.”
“아, 알았어요 알았다고”
“오키오키 내 이번에 나갔다 오면 이 짝퉁말고 진퉁으로 꼭 사다 줄텐게”
“진짜 거 대충 좀 하고, 어디 지금 파병가오?”
“아따 너 뭔 일 있냐? 또, 아주 짜증 대박이시다잉, 그려, 나 파병간다 이 씨불놈아.”
“늦겠소. 빨리 가요.”
"씨빠, 아주 날 못보내서 난리구만. 그려, 간다 가!"
자성은 투덜대며 게이트 안으로 사라지는 정청의 뒷모습을 눈으로 쫓았다.
가지 말라고 잡고 싶었지만, 스스로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너무나 많았기에 돌아보는 정청에게 잘 다녀오라고 손을 들어 흔들며 배웅 할 뿐이었다.
자성이 몸을 돌려 입구로 걸음을 옮기며 주변을 둘러보자 헛것을 본 것처럼 아까 보였던 경찰들의 모습이 모두 사라져 있었다.
불안한 느낌에 자성은 정청이 사라진 게이트를 한번 돌아보고, 괜한 걱정을 떨쳐버리듯 고개를 젓고 공항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몇일간 바쁘게 사무를 보고 상해로 떠나는 정청을 배웅한 자성은 피곤한 몸을 이끌어 집으로 향했다. 익숙하게 현관문을 열고 들어선 자성은 유독 어둡게 느껴지는 불빛을 느끼며 이상한 느낌에 고개를 돌렸다.
“이게...”
자성은 자신의 집 거실에 베란다를 가리고 빼곡하게 놓인 상자들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진석도 고개를 갸웃 기울이며 입을 열었다.
“알아볼까요?”
“그래.”
자성이 거실로 걸음을 옮겨 자신의 키를 넘게 빼곡하게 쌓여있는 상자들 중 하나를 골라 상자를 열어보았다. 상자 안에는 에어캡으로 싸여진 익숙한 장식물과 도구들이 눈에 보였다.
짚이는 곳이 있어서 휴대전화를 꺼내어 통화를 하려던 순간, 자성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화면에는 정청이라는 이름이 떠 있었고 자성이 통화버튼을 눌러 전화를 받았다.
[씨바, 브라더!]
“이거 뭡니까?”
[이것이 뭔지 워떻게 알 것이여? 씨바. 뭐가 말이냐?]
"형님 짐이 왜 내 거실에 있는 거요."
[아, 벌써 도착 해부렀나 보네잉.]
“형님 짐을 왜 내 집에 가져다 놉니까?”
[잉? 고것이, 으따, 시간 다됐다. 빠스트클레스를 놓칠 수는 없은께, 다녀와서 보자잉.]
“잠깐...!!!”
자성이 뭐라고 말하기 전에 청이 먼저 전화를 끊었고 자성은 당혹스러운 얼굴로 휴대전화를 보고, 다시 통화버튼을 눌러보았지만 휴대전화 넘어 에서는 고객의 전화기가 꺼져있다는 안내 멘트만 흘러나올 뿐이었다.
“.......”
자성은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오는 것을 느끼며 손을 올려 구겨진 이마를 손끝으로 눌렀다.
“형님?”
“큰형님 집 어떻게 했는지 좀 알아봐라.”
“네.”
진석이 여기저기 전화를 하더니 이내 자성에게 다가와 말을 꺼내었다.
“형님. 어제 큰 형님께서 집 처분 하시고, 사무실에서 주무셨다고 합니다.”
“뭐?”
자성은 진석을 돌아보고 자신이 헛들은 건 가 싶어 다시 되물었다.
“직접, 집을 처분 하셨다고 하는데요.”
“누가.”
“큰형님께서요.”
“그래서, 어제 사무실에서 주무셨다고?”
“네.”
쇄기를 박는 진석의 말에 자성은 헛웃음을 흘렸다.
그 좋은 강남 지역에 있는 집을 처분해 버리고 사무실에서 잤다니.
자신이 쫓아내지 못하도록 집을 처분해 버린 정청의 약은 행동에 자성은 청을 쫓아낼 다른 방법이 없을까 싶어 생각해 보았지만, 딱히 좋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원룸을 얻어 짐을 옮긴다고 하더라도 청은 또 다시 원룸을 처분하고 자신의 집으로 짐을 밀어 넣을 것이 뻔했다.
“하아...”
앞 뒤 가리지 않고 무대포로 밀고 들어온 정청의 행동에 자성은 한숨이 나올 뿐이었다.
“형님?”
“놔둬. 큰 형님 짐이니까. 너도 퇴근해라.”
"네. 쉬십시오"
자성은 피곤하다는 듯 손을 저어 진석을 돌려보냈고, 진석이 인사를 하고 집을 나서자 서재로 향한 자성은 휴대전화 유심칩을 갈아 끼웠다.
휴대전화를 켜자 문자가 하나 도착했다는 것을 알려왔다.
[이틀 뒤, 병원 옥상 정원 10시.]
자성은 간결한 문자메시지를 다시 한 번 눈으로 훑어 머리에 인식시키고 익숙하게 문자를 삭제했다. 휴대전화를 끄고, 다시 유심칩을 갈아 끼운 자성은 몸이 땅에 끌리는 것을 느끼며 침실로 향했다.
자성이 잠을 자기 위해 침대에 몸을 눕혔지만 눈을 감아도 잠들지 못했다. 침대 위에서 한참을 뒤척이던 자성은 결국 몸을 일으켜 다시 서재로 걸음을 옮겼다. 어두운 서재에 들어선 자성은 책상 두번째 서랍을 열어 라벨이 붙어 있지 않은 흰 약통을 꺼내어 익숙하게 약 한알을 입에 넣고 삼켰다.
마른 알약이 목에 걸린 생선뼈처럼 목을 누르며 식도를 타고 넘어갔다.
자성은 약 기운이 몸에 퍼질 동안 샤워라도 할 심산으로 와이셔츠의 단추를 풀며 발을 움직여 욕실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