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단한 검사를 끝내고 휴대전화를 내려 보며 중구에게 전화를 걸어야 하나 고민하던 자성은, 휴대전화를 다시 주머니에 넣고 마음 편하게 택시를 타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휴대전화가 울리자 자성은 액정을 확인하고 걸음을 멈추고 통화버튼을 눌렀다.
“이자성입니다.”
[어디냐.]
“이제 가려는 길입니다.”
[연락하라고 했잖아.]
“바쁜 거 알고 있습니다. 굳이 오지 않아도...”
[시끄러, 갈테니까. 기다려.]
“괜차....”
자성은 자신이 대답하기 전에 전화를 끊어버린 것을 보고 한 숨을 내쉬었다.
“사람 말은 좀 끝까지 들으라고.”
아무래도 오늘 하루는 피곤 할 것 같았다.
자성은 손에 쥐여져 있는 휴대전화의 까만 액정을 손으로 쓸었다.
액정을 맴돌던 자성의 손가락이 1번을 꾹 누르자 익숙한 번호가 액정에 떠오르며 통화음이 흘러 나왔다.
[뭐시여?! 무신 일 있냐?!]
꽤 긴 연결음이 끊어지며 방정맞은 목소리가 들려오자 자성은 자신의 얼굴에 미소가 지어지는 것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그런거 아니오.”
[잉? 그람 와 전화 했냐. 씨벌, 심장이 벌떡벌떡 허네.]
“그냥... 했소.”
자성은 보고 싶어서 전화 했다는 낯간지러운 소리를 차마 내뱉지 못했다.
[씨발, 병원이냐? 의사가 뭐라 허든?]
“그런 거 아니오.”
청은 수화기 너머로 넘어갈 듯이 귀를 바짝 대고 힘없는 자성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그라믄 와 그러냐.”
[피곤해서 그런가 보오.]
“빨랑 가서 쉬어라잉. 씨발! 니가 옆에 없은 께 내가 뭘 알 수가 없으니 미쳐불것다! 참말 괜찮냐? 내가 느 출근한다고 했을 때 말렸어야 혔는디!”
[괜찮소. 끊어요. 바쁠텐데.]
청은 평소와 다르게 먼저 끊어지지 않은 전화에 다시 입을 열었다.
“씨불, 집에 도착허면, 연락혀라. 알것냐?!”
[알겠소.]
“꼭 연락혀!”
한 박자 느리게 휴대전화가 끊겼고, 청은 불안한 기운을 느끼며 휴대전화를 내려 보았다.
“뭔 일이냐. 느.”
정청은 변호사를 불러 일을 빠르게 진행시키라고 말하고, 일을 마무리 짓는 대로 한국으로 향하는 비행기 표를 알아보라고 지시했다.
-
자성은 기둥에 기대어 서서 생각에 잠겼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다시 주경이를 다시 만나게 되더라도, 그녀에게 자신이 뭘 해줄 수 있을까. 그 때라면, 경찰의 신분을 갖게 된 자신에게 남은 것은 쥐꼬리만한 월급과, 몸뚱이 뿐일 텐데. 아니, 어쩌면 그냥 이자성이라는 남자일 뿐일지도 몰랐다. 강과장이 움직여서 자신의 정체를 아무도 모르는 해외로 나가게 된다면 두 번 다시 한국에 돌아오지 못할 터였다. 약한 주경의 몸은 타지 생활을 잘 버틸 수 있을까? 언제가 될지 모르는 그 때까지 주경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까? 자신이 그녀에게 갔을 때, 그녀는 이미 다른 사람과 행복한 삶을 누리고 있다면 자신은 잊고 싶은 과거가 될 뿐이었다.
자신과 살면서 마음고생을 충분히 한 여자였다. 자신이 그녀에게 찾아가 고통을 줄 수 있는 자격 따위는 없었다.
더 이상 잡고 있어봤자 그녀에게 미안함만 더 커지기에, 자성은 긴 한 숨과 함께 주경에 대한 생각을 털어내 버렸다.
언제 돌아갈지 모르는 그 실낱같은 희망사항을 부여잡고 또, 형철의 명령에 따라 정청과 골드문에 대한 자료를 넘겨주어야 하는 현실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자신이 돌아 갈 수는 있을까?
그 습하고, 눅눅한 경찰차 안으로?
이미, 답은 정해져 있을 지도 몰랐다.
빠앙-!
신경질적인 클락션 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자성의 앞에 짙은 코팅이 된 차가 멈추어 있었다.
코팅이 된 창문이 내려가더니 중구가 얼굴을 구긴 채 자성을 노려보았다.
“무슨 잡생각이 그렇게 많아. 빨리 타라. 짱깨새끼가 전화질이잖아.”
정청이 자성이 ‘그냥’ 연락한 게 신경 쓰인 모양인지 중구의 휴대전화가 또 쉴새없이 울리고 있었다.
자성이 차에 올라타자 중구는 자신의 전화를 자성에게 던졌다. 반사적으로 휴대전화를 받아낸 자성이 고개를 들어 중구를 바라보았다.
“해결해.”
휴대전화 액정에 뜬 익숙한 번호를 보고는 용캐 중구가 정청의 전화번호를 수신거부 해놓지 않은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통화버튼을 누르고 전화기를 귀에 대자마자 욕이 한바가지 쏟아져 나왔다.
[이 호로새끼야! 느는 인생 자체가 질풍노도냐!!! 씨발! 전화는 왜 안 받고 지랄이여! 개새끼야!]
“....형님.”
[...웜마? 내가 느한테 걸었냐?]
“중구형님 왔소. 지금 같이 가고 있으니까. 걱정 그만 하소. 내가 갓난애도 아니고 무슨 걱정이 그렇게 많아.”
[아따, 복덩이인 우리 브라더가 기운이 없은께 그래야. 씨바. 느 오널은 회사 가지 말고, 집으로 바로 가라잉. 알것냐?]
“알겠소.”
[느, 정말 암일 없냐.]
“...중구형 전화요. 괜히 통화료 나오니까. 끊소.”
자성은 청의 대답이 들려오기 전에 전화를 귀에서 때어내고 통화를 종료했다.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고개를 돌리지 중구가 무심하게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잘 썻소. 중구형.”
자성이 휴대전화를 중구에게 건네어주자 중구가 휴대전화를 받아 들고 자성을 훑어보았다.
“할 말 있소?”
“둘이 사귀냐?”
“그게 무슨 소리요?”
“짱개새끼가 전화하는 꼴이 바람난 마누라 단속하는 것 같아서.”
자성은 불쾌감을 얼굴에 들어내며 의뭉스러운 미소를 짓는 중구를 바라보았다.
“형님 앞에서는 그런 말 하지 마시오.”
“봐서.”
“중구형.”
“짱깨새끼 놀리는 재미가 쏠쏠 하거든.”
장난꾸러기 초등학생처럼 씩 웃는 중구의 대답에 자성은 두통이 몰려오는 것을 느끼며 손을 들어 관자놀이를 힘주어 눌렀다.